끝없이 펼쳐진 청보리 밭은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진 봄빛 같았습니다. 여린 초록색 물감이 바람을 따라 부드럽게 흔들리며 눈앞 가득 넘실거렸죠. 하늘은 더없이 맑고 투명한 파란색으로, 이 초록의 바다를 조용히 덮고 있었습니다.
살랑이는 봄바람이 보리 이삭 사이를 지나갈 때마다, 귓가에는 듣기 좋은 사각거림이 가득했습니다. 마치 밭 전체가 살아 숨 쉬며 저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건네는 듯했죠. 아주 작고 나지막한, 하지만 마음 깊숙한 곳까지 전해지는 따뜻한 속삭임 같았습니다.
그 넓은 초록의 품속에, 한 줌의 흙으로 된 길이 나 있었습니다. 저 멀리 작게 보이는 나무들을 향해, 망설임 없이 곧게 뻗은 길이었습니다. 그 길을 따라가면 무엇이 기다릴까요?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, 작은 표지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.
길모퉁이에 조용히 서 있던 **'오메길 23'**이라는 작은 표지판. 그저 그 자리에 서서, 지나가는 이들에게 무언의 인사를 건네는 듯했습니다. 이 길 위에서 만나는 수많은 풍경들 중, 오늘은 23번째 마주하는 순간인가 보다, 하고 마음속으로 되뇌었습니다. 그 숫자가 가진 의미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. 단지, 이 길 위에 내가 서 있다는 작은 기록처럼 느껴졌습니다.
길은 때로는 보리밭 사이를 가르며 시원하게 뻗어 있었고, 때로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저 멀리 보이는 메타세콰이어 나무 숲으로 이어졌습니다. 푸른 보리의 생기 넘치는 초록과,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켜온 메타세콰이어의 깊고 고요한 초록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.
바람은 보리밭과 메타세콰이어 잎사귀를 번갈아 쓰다듬으며 다른 소리를 만들어냈습니다. 보리의 싱그러운 шелест와 메타세콰이어의 차분한 속삭임. 그 소리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자연의 교향곡 속에서 저는 그저 걷고, 또 걸었습니다.
길 위에 홀로 서서, 눈을 감고 바람을 느꼈습니다. 내 안의 복잡한 생각들이 바람과 함께 흩어지고, 오롯이 이 순간의 평화만이 남는 것을 느꼈습니다. 이 초록의 풍경과 바람의 손길이, 지친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듯했습니다.
오메길 23, 숫자가 새겨진 작은 표지판 앞에서 잠시 멈춰 섭니다. 이 길은 어디로 이어지든 상관없습니다. 중요한 것은 이 길 위에서 내가 만난 봄날의 바람과 초록, 그리고 내 안의 고요함이니까요.
오늘, 당신의 마음은 어떤 길 위에 서 있나요? 잠시 숨을 고르고, 바람이 데려다주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보는 건 어떨까요.